요즘, 코로나 팬더믹으로 비일상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쇄미록을 읽으면서, 싸움은 비 일상 인데, 비 일상이 계속되면 일상이 된다. 일상의 반대말은 여행이다.
코로나19도 싸움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싸움에 있더라도 혼사도 있고, 여행도 있고, 술도 마시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약 420여 년 전, 임진왜란 시절에 서민들은 어떻게 생활했나 … 임진왜란 기록물로는 3개가 있다.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의 국가 차원 기록물 “징비록” , 이순신 장군 영웅의 일기 “난중일기”와 더불어 오희문의 “쇄미록” 이다
“쇄미록”은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 이란 뜻이다. 사적인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1년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었다.
쇄미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또 하나의 임진왜란,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 피란 중의 생활은 “비일상”이지만, 오래동안 이어지면 “일상”이 된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에서 1598년 12월까지 7년 동안이다. 조선 시대를 전기, 후기로 나눌 때 기준점이 임진왜란 이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중국(명나라)의 동아시아 3국의 국제 싸움이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1592년 임진년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부산 상륙 했는데, 3일 후에 소문을 듣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피해 주로 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지금 이라면 어떻게 할까?
산속의 피란 생활로 바위 아래에서 잤다, 겁탈 당한 여성 등 전란 당시 왜적의 만행 기록이 곳곳에 등장한다. 병들고 굶주리다 죽은 어미의 시체를 묻을 힘도 없는 처참함, 왕릉도 파헤쳐진 참혹함 등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약, 지금 싸움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 한 겨울, 산 속 피난 생활로 바위 아래서 잘 수 있나? 하루 하루 편안함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겠죠.
● 흉적은 아직도 섬멸하지 못하고 , 1593년
조선 시대에도 외가, 처가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당시 생활을 알 수 있다. 16세기까지 지속된 것이 처가 살이 다. 조선 중기까지는 외가의 비중이 컸으며, 딸이라고 해서 상속에서 불이익을 받지도 않았다.
전란의 또 다른 공포가 전염병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질과 학질 등의 질병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조선시대엔 전염병을 역병이라 불렀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역병 및 역질에 관한 기록이 1,400건 이상 나온다. 주된 전염병은 콜레라(호열자), 두창(천연두, 마마), 성홍열,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 이다.
왕도 예외는 아니다. 두창 (천연두, 마마) 으로 고생한 왕으로는 광해군, 숙종 등이 있다.
● 그저 하늘의 뜻을 따를 뿐 , 1594년
조선이 일본 왜군과 명나라의 싸움터였으니,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이 처참했다.
계집 종 둘을 무명 13필을 주고 샀다는 내용이 있다. 지금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당시에는 자연스럽게 거래 되고 있었다.
한국의 역사에서 노비 제도는 기원전 20년 이전인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자 종인 노(奴)는 창두, 짧은 치마 때문에 다리가 붉게 보인다 하여 여자 종인 비(婢)는 적각 이라 불렀다.
15세기 조선 사회의 기본적인 신분 구조는 양천제 였다. 권리와 의무가 있는 양인과 권리가 없는 천인 으로 구분 되었다. 천민의 대다수는 노비였다. 그 외에도 백정, 광대, 사당, 무격, 기녀, 악공 등이 있었다. 노비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 불과 백 여 년 전까지 존재했던 제도다.
싸, 전란 시기 먹을거리가 없어 양반들도 하층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식사를 생명을 이어 갔다.
● 이루 말할 수 없는 농사의 기쁨 , 1595년
당시에도 지금의 수의사 처럼, 말을 치료하는 마의가 있었다.
1595년 12월 25일, 날이 밝기 전에 지진이 났다. 예나 지금이나 지진은 발생하는 자연 현상이다. 싸움 중에도 양반들은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하였다.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는 작은 술자리라도 베풀어 서운함을 달래 주려고 한 생활도 알 수 있다.
● 떠돌다가 임천에 와서 산 지 벌써 4년 , 1596년
공이 있는 노비의 제사를 지내 주기도 했다. 전란 시기에도 혼인과 제사는 치러졌다. 싸움 중에도 사람들의 삶은 이어진다. 특히 “장가를 보내러 간다” 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당시 처가 살이 관행이 지켜지던 사회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전란 중에도 양반의 일 중 제일 중요한 일이 제사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지극한 기쁨 뒤에 비통한 마음이 , 1597년
시름을 없애는 데는 술만 한 것이 없다.
일기 내용을 보면, 당시에는 산에 호랑이도 많았던 것 같다.
양반 사회에서 과거 급제는 입신양명은 물론이고 양반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 주는 “가문의 영광” 이다.
장남의 장원 급제 잔치가 끝날 즈음, 한편으로는 두 달 전에 사망한 딸 단아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 하는 모습도 보인다.
● 흉악한 왜적은 여전히 변경을 차지하고 , 1598년 … 일본 왜군 완전 철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국토는 황폐해지고 민심은 사나워졌다. 저자 오희문의 생계 수단은 관아나 친척에게서 의 선물이나 교환 형식으로 받은 물품에 크게 의지했다. 가족이 모여 정착하게 되자 농사를 짓고 양잠, 양계, 양봉 같은 부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왕실에서 서민까지 누구나 즐긴 술 … 대표적인 술은 막걸리 라고 불리는 탁주와 청주, 소주였다. 막걸리는 “마구 걸러낸 술” 이란 뜻이다. 소주는 “가열하여 증류한 술” 이라는 뜻인데, 여기에 소(燒, 불사를 소)는 우리말로 “고아 내린다”는 뜻이다.
쇄미록에는 즐기는 여가 생활에 대한 기록도 종종 보인다. 바둑과 종정도 놀이 (주사위를 가지고 하는 놀이) 를 하거나, 장기를 두고 쌍륙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수만큼 말을 써서 먼저 궁에 들여보내는 놀이) 을 하면서 즐겁게 놀며 긴 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여성의 놀이로는 강강수월래, 놋다리밟기, 길쌈놀이, 다듬이 놀이 등이 있다.
● 예순 나이에도 늘 배고픔 속에 사니 , 1599년
전염병처럼 무서웠던 호환 …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호랑이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호랑이 피해가 많아서 호랑이로 인한 재앙을 “호환” 이라고 불렀다.
백성들이 자주 찾는 산신각 에는 으레 잘생긴 큰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는 산신의 그림을 모셔 놓았다
● 쇠한 가문을 창성하게 떨치기를 , 1600년
“꿈속의 징조가 하도 이상하여 아침에 일어나서 대략 써 두었다. 훗날에 징조와 맞는지 보고 싶어서 이다 ” 저자 오희문은 자신의 꿈과 천재지변이 길흉의 징조라고 믿었다.
● 한양에 도착해 그만 쓰기로 하다 , 1601년
1591년 11월 27일 한양을 출발하면서 시작된 오희문의 일기는 1601년 2월 27일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총 9년 3개월 (총 3,360일)의 여정이다. 53세에서 63세가 되었다.
자신의 일기를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 이란 의미로 “쇄미록(琐 자질구레할 쇄, 尾 꼬리 미, 錄 기록할 록) 이라 지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의미 있는 말이다. 하루 하루 즐기며 사는 것이 행복이다.
출처 :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 (오희문 지음, 신병주 해설)
글쓰기 2022.1.27. 업데이트 202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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